2010년 3월 16일 화요일

<문제아서 전문의로 변신한 김호경 씨>

"한인 청소년들이 나를 보고 좌절하지 않았으면..."

(서울=연합뉴스) 왕길환 기자 = 1997년 미국 이민을 기점으로 `김호경'과 `제시 김(30.Jesse Kim)'은 같은 사람이면서도 전혀 다른 사람이 됐다.

전북 익산에서 태어난 김호경은 가정불화 때문에 밤마다 겁에 질려 있었고, 사춘기를 성적 부진아와 문제아, 반항아로 낙인 찍힌 채 보냈다. 끝내 고교 1학년 때 자퇴를 했고, 1년 6개월을 골방에 숨어 살며 꿈도 희망도 없이 세월을 보냈다.

1997년 어느 날, 잃을 것도 버릴 것도 없었던 그에게 고모를 통한 미국 이민의 기회가 찾아왔다. 로스앤젤레스에 첫발을 디딘 김호경은 주위의 어떤 도움도 거부하고 독립을 선언하며 시애틀로 떠났다. `제시 김'의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영어 한 마디 못하고, 땡전 한푼도 없는 제시 김의 미국 생활은 가시 발길이었다. 그러나 잡초 뽑기, 아르바이트, 조교 업무 등으로 고된 노동을 병행하면서도 온 힘을 다해 공부했다. 세리토스 칼리지를 4.0만점으로 졸업하면서 `올해의 학생상'을 받았고, 이후 UCLA에 편입해 예비 의대생이 됐다.

의대 병리학부 연구실 보조로 일하며 인간 세포를 배양하고 연구논문 집필에도 참여한 그는 워싱턴대로부터 연구자를 위한 프로그램에 전액 장학생으로 와 달라는 제의를 받았지만, 현장의사의 길을 선택해 남가주대(USC) 의대에 들어갔다. 의대 졸업 후 인턴 1년차 때 인턴으로선 전례 없이 미국 의사 면허 국가고시에서 최고점을 받았다. 존스홉킨스 병원에서 응급의학 전문의 과정을 밟은 그는 전미 응급의학 임상 국가고시에서 3년 연속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아 존스홉킨스에서 가장 촉망받는 의사로 주목받았다.

그는 현재 시애틀에 있는 워싱턴대학과 세인트 프란시스 병원에서 응급의학과 전문의로 근무하고 있다.

김 씨는 16일 미주 한국일보와 인터뷰에서 "한인 청소년들이 가난하거나 환경이 나쁘다고 좌절하지 말고, 열정과 노력으로 꿈을 이루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나는 똑똑한 사람이 아니다. 순간순간 엄청난 열정과 노력을 쏟아 부었을 뿐"이라며 "한인 청소년들이 환경 때문에 좌절하지 않고 나를 보고 희망과 용기를 갖고 목표를 달성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응급실에서 위독한 생명을 살리는 그는 지난해 말 자서전 `내 시련의 이름은 자유다'(랜덤하우스)를 펴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는 자서전에서 "`불가능이란 없다', `누구에게나 반드시 기회는 주어진다'는 분명한 신념을 붙들었습니다. 그리고 흔들림없이 나아갔습니다. 새로운 삶, 새로운 인생의 도전을 했습니다. 그래서 기회를 내 것으로 만들었습니다"라고 밝혔다.

문제아에서 워싱턴대 전문의로 변신한 제시 김 씨<<미주한국일보 제공>>

[펌]양은모, 양은성 공신 남매 이야기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 부모는 환경조성 역할만

양은모(21), 양은성(19) 남매는 영재들이 모인 민사고에서도 공부 잘하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울 만큼 수재로 꼽혔다. 2년 전 민사고를 졸업해 현재 스탠퍼드 대학에서 컴퓨터 사이언스를 전공하는 양은모씨는 고교 재학 당시 AP(대학과목선이수제) 성적우수로 인터내셔널 칼리지보드에서 주는 최우수상을 받았을 만큼 성적이 좋았다. 삼성장학생으로 선발돼 학비와 체류비 일체를 지원받고 있다. 양은성양 역시 올해 모든 과목 A학점으로 전체 1등을 기록하며 졸업했다. 올해 대한민국 인재상을 받은 그는 예일대를 수시(Early)로 합격한 상태다. 이들이 유명한 공신남매가 되기까지는 본인들의 노력 못지않게 어머니 이미경(45)씨의 공도 한몫했다. 이씨의 얘기를 들어봤다.

"두 아이 모두 네 살쯤 한글을 깨쳤는데 그 뒤로부터는 손에서 책을 안 놓을 정도로 책에 빠졌어요. 또래 아이들과 비교해 범상치 않다고 여겼죠. 뛰어난 잠재력을 살려주기 위해 고심하고 행동으로 옮긴 결과 두 아이 모두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었어요."


◆ 시기에 맞게 엄마 역할을 바꾸다

대학에서 교육심리를 전공한 이씨는 자녀 교육에 남달리 관심이 많았다. 아이를 낳고서는 열 일을 제쳐놓고 자녀교육 강의에 찾아다닐 만큼 열성이었다. 자녀를 잘 지도하기 위해서는 부모의 노력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강의를 들으면서 아이를 부모의 소유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를 존중하는 방법, 있는 모습을 그대로 사랑하는 법 등을 배웠고 두 아이를 대할 때마다 배운 것을 늘 떠올렸다"고 말했다.

두 아이가 초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이씨는 아이들의 가장 좋은 친구이길 자처했다. 늘 아이들과 함께 다니며 즐기기를 좋아했다. 다양한 경험을 하도록 해주고자 전시회나 박물관, 공연장에 함께 다녔고 종종 여행도 떠났다. 특히 은모군이 초등 5학년, 은성양이 초등 3학년 무렵 캐나다로 건너가 1년 7개월간 살았을 때는 한시도 아이들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휴일이면 늘 도서관에 함께 다니며 책을 읽었다. 아이들과 대화를 나누길 좋아했지만 단 한 번도 공부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은성양의 얘기다.

"부모님은 한 번도 성적표를 보여달라거나 공부하라는 말을 한 적이 없어요. 성적에는 무덤덤한 반응을 보이셨죠. 초등 때까지는 공부보다는 가족 간의 추억을 많이 쌓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어요. 비뇨기과 전문의이신 아버지가 지방에서 하는 학회를 참석할 때면 저랑 오빠는 학교를 빠져서라도 온 가족이 여행을 함께 떠났지요"

한국으로 돌아와 서울 대치동에 터를 잡고 나서는 이씨의 역할이 철저히 달라졌다. 아이들의 학습 매니저 역할을 톡톡히 했다. "중학교에 들어간 은모가 어느 날 학원에 보내달라고 했어요. 선행학습을 한 덕분에 실력이 좋은 친구들이 많다고 하더군요. 초등학교 때까지 사교육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기에 은모가 받는 위기의식이 예상보다 컸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지요. 상황이 달라진 만큼 적응할 때까지 옆에서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자고 결심했어요. 그때부터 두 아이에게 맞는 학원을 수소문하고 아이 스케줄에 맞게 로드매니저 역할을 했죠. 아이에게 필요한 것과 부족한 부분을 미리 살피면서 보완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심리적인 안정을 주고자 봉사활동도 함께 했다. 방학 때면 캄보디아, 네팔 등지로 온가족이 의료봉사를 떠났다. 은성양은 "오지에서 어렵게 사는 사람들을 보면서 지금의 삶에 만족하고, 감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두 아이가 민사고에 입학하고 나서는 격려자로 변신했다. 기숙사 생활을 하는 아이들이 방학 때마다 집에 돌아올 때면 최대한 마음을 편하게 해주고자 배려했다. 학기중에는 치열한 경쟁을 치르는 아이들에게 조금이나마 마음의 휴식을 느끼게 해주려는 의도였다.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다는 말을 자주 해줬다.

"부모와의 관계가 좋은 아이들이 그렇지 않은 아이들보다 학습력이 높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어요. 마음이 안정돼야 공부에 집중할 수 있다고 여겼지요. 부모의 역할은 아이들이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을 때까지 환경을 조성해주는 것이며, 아이들 스스로 그것을 발견하고 열심히 나아가면 곁에서 응원하는 것으로 한발 물러나야 해요. 재촉하거나 채근하면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오죠."

◆아이 스스로 결정하고 판단하게 하라.

이씨는 가장 힘들었던 순간을 '사교육 일 번지' 대치동에 정착했을 때로 기억한다. 실력이 뛰어난 친구들 때문에 적지 않이 마음 고생을 한 남매를 보면서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또한 주변의 온갖 사교육 정보들을 접하면서 혼란에 빠지곤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이씨는 한발 물러나 여유롭게 행동했다.

"대치동에 오면 학원이 많은 데다 갖가지 사교육을 시키는 엄마들이 적지 않아 부화뇌동하기 쉽죠. 부모의 욕심 때문에 시달리는 아이들을 보면서 저 스스로 중심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조급함을 버리고 저보다는 아이 입장에서 생각했지요"

학원을 선택할 때는 철저히 아이들의 의사를 반영했다. 아무리 좋은 선생님이라고 입소문이 났다고 해도 아이가 싫다고 하면 보내지 않았다. 되도록이면 한 곳을 오래 보냈다. 또한 사교육을 많이 시키지도 않았다. 부족한 과목에 한해 몇 과목만 학원의 도움을 받았다. 학원에서 배운 내용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혼자 공부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학원 선택을 스스로 했기에 부담이 없었다고 말하는 은성양은 "웬만한 대치동 아이들이라면 응시하는 올림피아드 준비도 특별히 하지 않아 여유시간이 많았다. 남는 시간을 오로지 학교 공부에 투자한 결과 최상위권 내신 성적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민사고를 지원한 것도 전적으로 아이들의 의사였다. 은모씨가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우연히 민사고에서 열린 캠프에 참가하고 나서 민사고 진학을 꿈꿨던 것. 목표를 향해 열심히 공부하는 아이를 이씨는 곁에서 묵묵히 응원해줬다. 오빠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은성양 역시 일찍부터 민사고를 목표로 공부에 매진했다.

이씨는 "아이들이 방황하지 않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엄마부터 중심을 잡아야 한다. 아이를 귀하게 여기고 의사를 존중해줘라"고 충고했다.


-출처 : 방종임 맛있는공부 기자 bangji@chosun.com

2010년 3월 11일 목요일

이해인 수녀님 입적하신 법정 스님께 쓴 편지글

법정 스님께

언제 한번 스님을 꼭 뵈어야겠다고 벼르는 사이 저도 많이 아프게 되었고 스님도 많이 편찮으시다더니 기어이 이렇게 먼저 먼 길을 떠나셨네요.

2월 중순, 스님의 조카스님으로부터 스님께서 많이 야위셨다는 말씀을 듣고 제 슬픔은 한층 더 깊고 무거워졌더랬습니다. 평소에 스님을 직접 뵙진 못해도 스님의 청정한 글들을 통해 우리는 얼마나 큰 기쁨을 누렸는지요!

우리나라 온 국민이 다 스님의 글로 위로 받고 평화를 누리며 행복해했습니다. 웬만한 집에는 다 스님의 책이 꽂혀 있고 개인적 친분이 있는 분들은 스님의 글씨를 표구하여 걸어놓곤 했습니다.

이제 다시는 스님의 그 모습을 뵐 수 없음을, 새로운 글을 만날 수 없음을 슬퍼합니다.

'야단맞고 싶으면 언제라도 나에게 오라'고 하시던 스님. 스님의 표현대로 '현품대조'한 지 꽤나 오래되었다고 하시던 스님. 때로는 다정한 삼촌처럼, 때로는 엄격한 오라버님처럼 늘 제 곁에 가까이 계셨던 스님. 감정을 절제해야 하는 수행자라지만 이별의 인간적인 슬픔은 감당이 잘 안 되네요. 어떤 말로도 마음의 빛깔을 표현하기 힘드네요.

사실 그동안 여러 가지로 조심스러워 편지도 안 하고 뵐 수 있는 기회도 일부러 피하면서 살았던 저입니다. 아주 오래전 고 정채봉 님과의 TV 대담에서 스님은 '어느 산길에서 만난 한 수녀님'이 잠시 마음을 흔들던 젊은 시절이 있었다는 고백을 하신 일이 있었지요. 전 그 시절 스님을 알지도 못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수녀님 아니냐며 항의 아닌 항의를 하는 불자들도 있었고 암튼 저로서는 억울한 오해를 더러 받았답니다.

1977년 여름 스님께서 제게 보내주신 구름모음 그림책도 다시 들여다봅니다. 오래전 스님과 함께 광안리 바닷가에서 조가비를 줍던 기억도, 단감 20개를 사 들고 저의 언니 수녀님이 계신 가르멜수녀원을 방문했던 기억도 새롭습니다.

어린왕자의 촌수로 따지면 우리는 친구입니다. '민들레의 영토'를 읽으신 스님의 편지를 받은 그 이후 우리는 나이 차를 뛰어넘어 그저 물처럼 구름처럼 바람처럼 담백하고도 아름답고 정겨운 도반이었습니다. 주로 자연과 음악과 좋은 책에 대한 의견을 많이 나누는 벗이었습니다.

'…구름 수녀님 올해는 스님들이 많이 떠나는데 언젠가 내 차례도 올 것입니다. 죽음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생명현상이기 때문에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날그날 헛되이 살지 않으면 좋은 삶이 될 것입니다…한밤중에 일어나(기침이 아니면 누가 이런 시각에 나를 깨워주겠어요) 벽에 기대어 얼음 풀린 개울물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이 자리가 곧 정토요 별천지임을 그때마다 고맙게 누립니다…'

2003년에 제게 주신 글을 다시 읽어봅니다. 어쩌다 산으로 새 우표를 보내 드리면 마음이 푸른 하늘처럼 부풀어 오른다며 즐거워하셨지요. 바다가 그립다고 하셨지요. 수녀의 조촐한 정성을 늘 받기만 하는 것 같아 미안하다고도 하셨습니다. 누군가 중간 역할을 잘못한 일로 제게 편지로 크게 역정을 내시어 저도 항의편지를 보냈더니 미안하다 하시며 그런 일을 통해 우리의 우정이 더 튼튼해지길 바란다고, 가까이 있으면 가볍게 안아주며 상처 받은 맘을 토닥이고 싶다고, 언제 같이 달맞이꽃 피는 모습을 보게 불일암에서 꼭 만나자고 하셨습니다.

이젠 어디로 갈까요, 스님. 스님을 못 잊고 그리워하는 이들의 가슴속에 자비의 하얀 연꽃으로 피어나십시오. 부처님의 미소를 닮은 둥근달로 떠오르십시오.

2010년 3월 3일 수요일

꿈을 먹는 자와 내뱉는 자.

자기 스스로를 무참히 짖밟는 행위는 순간의 자극은 되지만 마음을 새로이 잡을 수 있는 기회를 억제하는 태도이다.

 

본인을 너무 내세우려 하거나 자신의 꿈에 대하여 지나친 자신감을 갖는 행위는 훗날의 자신을 억압시키는 태도이다.

 

고로 과유불급

 

자학이 아닌 반성을 하자. 그리고 자신감이 아닌 포부를 갖자.

 

2010.0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