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 6일 일요일

장자의 도가가상과 일대기

장자는 한 도가 사상의 내용이 담겨진 책의 내용이며, 이 책을 쓴 이의 이름이기도 하다. 내가 어렸을 때 읽었던 책이며 이번 기회를 통하여 다시 읽고 나니 장자에 의한 초기의 도가사상에 대한 뜻을 다시 상기할 수 있었다. 장자에 대한 기록이나 일화는 많지 않다고 한다. 다만 사마천의 사기에 단 몇 줄만 기록되어있을 뿐 장자에 대한 상세한 일화는 대부분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거나 장자가 쓴 서책의 일부를 통해서만 알 수 있었다. 장자는 도가사상의 시조인 노자의 도덕경보다도 더 확실히 이해하는데 용이하다고 한다. 이는 즉 중국 불교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으며, 시가(詩歌)와 산수화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남화진경이라고 불리는 장자는 총 33편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하지만 4세기 무렵에는 장자가 53편으로 구성되어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수많은 장자의 이야기가 전해내려 오고 있으나 대부분 왜곡되거나 명확하지 못하여 확실한 것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상가 장자에 대한 인품이나 그의 사상에 관련된 내용은 서책 장자 외편에 많이 나타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볼 이 책은 외편이 아닌 서책 장자의 전반적인 내용을 요약하여 정리한 것이다. 장자는 송나라시대에 태어났으며 초나라 시대가 되자 그의 고향에서 칠원이라는 하급관리로 지내왔다. 장자의 가르침은 대부분 불교의 시조인 노자로부터 인용되어 온 것이지만 노자의 가르침을 보다 널리 하여 광범위한 뜻으로 가르쳤다고 알려져 있다. 장자는 본래 성품이 괴팍한 성인이라 불린다. 그의 일화를 보면 개인의 안락함이나 대중들의 존경들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고 예측할 수 없는 성인이라고 한다. 사마천 사기 열전에 의거하면 장자는 늘 그의 의복이 거칠었으며 신발은 떨어져나가지 않도록 줄로 늘 묶고 다녔다고 한다. 그렇다 하여도 그는 자신이 결코 가난하거나 불행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해왔다. 이는 즉 장자의 근면함과 그의 줏대 있는 삶을 옆 볼 수 있다. 혜시라 불리는 그의 친한 벗은 장자의 부인이 죽음에 이르러 장례를 조문하러 찾아가는데 그때 장자가 돗자리를 깔고 대야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고 한다. 그의 벗은 당황하여 이게 무슨 해괴 망측한 모습인가 묻자 장자가 말하길 부인이 죽었는데 왜 슬프지 않겠느냐며 곧 말을 이었다. 애초에 아내에게는 생명과 형체도 기()도 없었다. 이는 유와 무에서 기가 생겨나고 이 기가 변형되어 형체가 되었으며, 이 형체가 다시 생명으로 모양을 바꾸었다. 이제 이 생명의 삶이 변해버리니 아내의 기는 춘하추동 만물의 기로 승화된 것이니 이 이치를 모른다는 것은 결코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러니 나는 이 슬픔을 멈추었다. 라고 말하였다. 이러한 일화를 볼 때 장자는 우주 만물의 이치를 깨닫고 이를 자신의 삶을 통해 스스로 인정하려 애썼다는 모습이 보인다. 장자는 자신의 뛰어난 재능과 학식을 가지고 묵가사상을 비판하기도 하였으며, 이로써 장자의 도가사상의 큰 밑받침이 되기도 하였다. 장자의 임종 즈음에도 장자의 제자들이 그의 장례식을 성대히 치루고 싶기에 그들끼리 의논을 나누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때 장자가 그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어 제자들을 불러 장례식을 성대히 치르지 말라고 하였다. 이 말인 즉 슨 장자가 대지 만물이 자기 자신이 태어난 곳이며 만들어진 곳이니 그들에게 자연히 돌아갈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말하길 그렇게 된다면 까마귀들과 들짐승들이 가만히 두질 않을 것이라며 그 모습을 차마 볼 수 없다 하였다. 그러자 장자가 제자들에게 말하길 땅속의 벌레들에게만 어찌 나의 한 몸을 먹이로 줄 수 있겠는가, 까마귀와 들짐승들에게도 주지 않는 다면 얼마나 공평치 아니한가라고 말하였다. 장자는 자신의 몸 하나라도 자연의 모든 이치에 어긋나지 않도록 하려 노력하였다. 그의 사상 속에는 세상 모든 만물에는 도가 있으며 이 도는 결국 한 인간으로써가 아니라 자연의 일부로써 함께 순환할 뿐임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은 장자의 기괴한 언동은 그의 숙명론에 대한 큰 깨달음에 직결되어있다고 한다. 장자의 사상에 의하면 인생의 모든 이치는 단 하나, 도에 의해 깨달을 수 있다고 하였다. 또한 장자는 모든 이치나 가르침, 즉 깨달음은 말이나 글로써 설명하고 배워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고 한다. 이는 즉, ()란 끝도 없고 시작도 없고 한계도 없음을 강하였음이다.  이 말인 즉 슨, 도의 속에는 선과 악도 없으며, 좋은 것과 싫은 것도 없음을 강조하였다. 다시 말해 모든 만물은 자연 스스로 흘러가도록 놔두는 것이 모든 도의 이치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이 책에서는 장자가 나비 꿈을 꾼 내용이 있었다. 나는 나비의 꿈을 꾸었을 때 마치 내가 나비인 줄 알았다. 하지만 깨어보니 나는 장주였다. 그러나 나 장주가 나비의 꿈을 꾼 것인지, 나비인 내가 장주의 꿈을 꾼 것인지는 알 수 없다.라고 말한 구문이다. 이 구문은 마치 우리의 옛 소설인 구운몽과 비교적 유사한 이야기이다. 인생은 결코 인생이 아닐 수 있으며, 나비의 생애가 될 수도 있음을 강조하였다. 이로써 노자의 도가사상은 장자의 폭넓은 범위의 도가사상으로 명확하게 자리매김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 장자를 읽고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책을 읽은 기억을 떠올리게 되었다. 사람은 과연 여러 목적의식을 갖고 살아나간다. 현대의 사람들은 행복함과 명예를 위해 살아간다. 과거의 사람들은 생계와 인()을 위해 살아간다. 하지만 장자는 자연의 만물 이치를 깨닫고 도()로써 모든 인생의 흐름이 평정됨으로써 살아감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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